매화나무 한 그루

과천현대미술관 격월 웹진에 실린 에세이


꽃 떨어진다, 꽃 떨어진다, 꽃 떨어진다.

아침상을 차리느라 수저를 놓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연거푸 외치신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거실 유리문 밖으로 여문 봄꽃들이 봄바람에 후두두 낙화한다.

매화꽃은 툭툭 땅으로 곤두박질치는데 벚꽃은 허공에서오래도록 빙글빙글 회오리를 그린다. 숟가락을 들고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앞마당에 나가있더라…….


3월께부터 햇살에서 봄을 느꼈건만, 유난히 따뜻해진 건 최근 일이다.

밥상의 모양새도 쑥이며 냉이 같은 봄나물로 향긋해져 몸도 마음도 풍요롭다. 일주일간 쑥국을 먹고 나흘 동안 냉이 부침개를 해먹었으니 머리꼭대기에서 꽃이라도 피어날 것 같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올 봄 나는 ‘제철음식’이라는 게 괜히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가령 하우스 재배가 보편화되어 이젠 겨울에도 수박을 먹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여름수박이 최고일 터, 그건 단지 박이 달고 싱겁고 크게 여물고 잘게 여물고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라는 거다. 겨울수박은 겨울에도 여름을 삼킨다는 데 경이로움이 있지만 여름수박은 뜨거운 열기의 여름을 쪼개고 여름의 향긋함을 씹고 비로소 여름의 물기를 목구멍으로 넘겨 발끝까지 여름 기운을 퍼뜨리는 만족감이 있다. 수박씨는 더 새까맣고 말이다.

어쨌든 아직은 봄, 쑥과 냉이로 나는 봄이 되어 비로소 라일락 향기도 맡을 수 있고 나비도 보이고 거리의 활기도 느낄 수가 있다.


몇 주 전 일이다.

작업실이 있는 창동 근처를 배회하다가 단독주택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골목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있지는 않아서 샛길이 있을 법도 했으나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 구멍을 찾는 것은 번번이 실패하여 한참을 하릴없이 두리번거리며 지나게 되었다. 집들은 주거용으로만 사용하지 않는지, 곳곳에 ‘파이프 수리’라든가 ‘천녀보살’ 등의 간판이 높이 걸려있었다. 담장은 없거나 낮았고 대문은 대개 열려있었고 담장과 담장 사이의 그 샛길처럼 생긴 공간이란 그마저도 엉성하여 아이가 커서 더 이상 쓰지 않은 세발자전거라든가 오래된 빨래건조대 등이 아무렇게나 자리를 차지한 채 놓여있었다. 

아이들이 모는 자전거가 요리저리 곡예를 부리듯 스치는 바람에 잠시 기우뚱하는 동안 얼핏 내 시선에 들어온 것은 몸빼 차림의 아주머니가 시장바구니를 들고 어느 집 현관문을 나서는 장면이었다. 나는 멈칫,했다.

담장도 없는 그 집의 현관문 앞 처마에는여름날 햇빛 가리개로나 쓰일 법한 플라스틱 차양이 늘어져 있었다. 아직 쌀쌀한 3월의 공기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았는데 십오륙 년은 족히 되어보이게 가장자리는 때가 끼고 그나마 푸르스름한 한가운데에 “福[복]”字가 커다랗게 엮어져 빛이 바랜 모양이었다.길 쪽으로 난 공간은 다용도실인지 고무대야와 장독들이 곡예 하듯 쌓여있었고 외벽은 칙칙했고 계단은 모서리가 부서져있었다.

별다를 것 없는데 왜 나는 발걸음을멈추어야 했을까.


매화나무였다. 

시선이 비껴가는 곳에 시멘트로 마감된 그 집 앞마당―나는 감히 그곳을 앞마당이라고 부르겠다―에 매화나무가 한 그루 서있었다. 꽃들은 만개하여 금방이라도 송이를 똑 떨어뜨릴 태세로 무겁게 매달려있었다. 사실 아주머니의 몸빼바지가, 낡은 차양이, 간유리 너머의 고무대야가 나무 한그루 때문에 화려하게 탈바꿈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순간 나는 눈앞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영문도 모를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야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위로를 받았다.


바야흐로 봄이다,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고 신문과 잡지는 떠들어댄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문자 그대로 정보일 뿐, 내가 봄을 비로소 느낀 건 이러한 일상의 단편적인 사건들을 통해서였다. 다소 상투적이고 상징적이긴 하지만 나는 꽃으로부터, 또 쑥, 냉이에서 봄을 보고 그렇게 봄을 지내고 봄 안에 살고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어김없이 매년 돌아오는 봄이지만, 매년 같은 자리에 피고 지는 꽃일지언정, 보지 않으면 지나쳐버리고 만다는 것을.

화가인 조르지오 모란디(Giorgio Morandi, 1890~1964)는 세계를 여행하더라도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보려하려기 보다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열심히 봐야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래 열심히 보자. 

멀리서, 가까이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혹은 가늘게 뜨고.


어쩌면 열어놓은 작업실 창문으로 날아 들어온 도봉산 산모기를 잡느라 박수를 치는 와중 꽃놀이 한 번 못가보고 여름을 맞이하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들어 허투룬 일상사에 의미를 붙여보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조금 더 감상적이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지금은 봄이지 않은가!

by 라온 | 2008/04/21 18:12 | soliloquy | 트랙백 | 덧글(0)

어두운 방 밝은 방

2008.04.05.

나즈막한 계단을 두 칸 올라가면 낮은 문(높이 160cm)이 있어. 그걸 옆으로 드르륵 밀면서 허리를 구부리며 집 안으로 들어가면 곧 3m가 채 못되는 높이의 어두운 공간 속에서 차차 여유로움을 느끼게 될거야. 바닥 면적은 어림잡아 지름 3.5m 정도의 원과 비슷한 크기… 거울 표면의 반짝이는 다면체들이 오각형 천정 아래의 허공에 매달려있고 그 중 몇 군데에서는 랜덤하게 말소리, 노랫소리가 나오는 거야. 그 아랫쪽 바닥 중앙에는 천정과 같은 오각형 모양의 커다랗고 나즈막한 의자가 있고 그 위엔 푹신한 방석이 있어 앉거나 드러누울 수도 있어. 어둠에 눈이 조금씩 익숙해지면 내부의 공간감과 햇빛이 다면체에 부딪혀 조각이 나서 벽에 반사 되는 것, 햇빛 구멍으로 상이 맺히는 것, 바깥 풍경이 늘어뜨린 천 위로 일렁거리는 것을 비로소 감상할 수 있게 되겠지.

…그러길 바래.


by 라온 | 2008/04/05 19:58 | work | 트랙백 | 덧글(0)

Greens(당신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work in progress

by 라온 | 2008/03/19 19:37 | work | 트랙백 | 덧글(0)

제목없음(가제: 땅의 드라마)

work in progress

by 라온 | 2008/03/18 19:20 | work | 트랙백 | 덧글(0)

기록

work in process

by 라온 | 2008/03/18 19:18 | work | 트랙백 | 덧글(0)

신체, 장소의 앨리스化 : 안강현의 비디오 퍼포먼스 – 정현

신체 : 안강현은 비디오의 주인공이자 보여지는 자이고 비디오는 그녀를 쫓아간다. 그녀의 무대는 실제 장소이지만, 계획된 지형을 사유한다기 보다 우연히 부딪히는 장소의 사건 속에 개입되거나 삽입되는 형식을 취한다. 이 지점에서 안강현의 신체는 그녀가 현재 속해있는 장소가 지니고 있는 상투적인 이미지를 차용한다. 작가는 자신이 거주하는 장소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신문이나 전화번호부 또는 지역주민들이 기증해 준 헌 책들을 이용해서 종이옷을 만든다. 상투적 이미지 혹은 정치적으로 부여된 문화 정체성의 기호를 그대로 답습한 듯한 종이옷의 패턴은 그녀의 신체를 이상한 나라에 빠져버린 « 앨리스 »로 바꿔버린다. 사실 하나의 기호화된 민속적인 문화형태인 전통의상을 다른 문화, 인종, 언어권의 사람이 입고 실제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질적인 현상을 자아낸다.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는 자신이 있던 세계와 다르게 시간적 공간적 척도가 사라져버린, 즉 다른 논리의 세상으로 흡입되지 않았던가. 그 이상한 세상에서 앨리스의 몸은 자신이 소유한 것이 아닌 그 곳의 논리에 의해 줄어들거나 커져버리면서 제어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만다. 다시 말해, 안강현의 종이옷은 자신의 신체를 확장시켜주는듯 하지만, 반대로 장소의 논리로 편입시키는 기호화된 신체로 전치된 형태이다. 프랑스의 비디오 이론가 뒤게(Anne- Marie Duguet)교수는 비디오 매체가 시각화하는 신체를 재건축된 총합적 신체로 정의내리고 있는데, 나는 비디오 퍼포먼스 속에 나타난 안강현의 신체 역시 위의 정의에 부합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총합적 신체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신체와 환경 사이의 관계성을 주목하는 것인데, 비디오 매체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조절하면서 서로를 연합시키거나 때론 병치, 혼합시켜버리는 매체적 특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총합적 신체란 주변환경의 접점을 찾아가는 신체성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장소 : 갑자기 낯선 장소에 떨어진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면 ? 타향에서 가장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낯선 공기와 다른 언어 그리고 작은 가이드북을 연신 훔쳐보기와 이방인 되기일 것이다. 가면을 쓴 채 어떤 낯선 곳의 공항대합실을 빠져나오고, 집시들의 마시장에 종이말을 들고 나타난 동양여자. 헬륨 풍선 몇개를 달고 마치 동화 속 주인공처럼 종이말을 들고 걸어가는 그녀에게 집시아이들은 친절하지 못한 정도를 넘어서서 그녀의 말을 마구 짖밟는다. 낯선 동양여자는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내지만 좀처럼 집시아이들의 난장판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 너의 말, 나의 말 »은 안강현의 비디오 퍼포먼스 작업 중 가장 다큐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만약 내가 엘리스가 되어 거울 반대편 세상으로 들어간다면, 또는 이상한 나라 안에서 의외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면 말이다. 이런 상상으로 또는 루이스 캐럴의 환상 속으로 안강현의 작업을 해석해보자.

 

장소를 사유하는 방식은 무한하다. 예술가는 지도를 보고 등고선을 따라가는 수동적인 태도의 여정을 거부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는) 제도적 관습을 해체하고 사전적 정보와 함께 개인적인 사유 또는 체험을 통한 총합적 태도를 의지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내게 안강현의 작업의 첫인상은 다다이스트적이기도 하고 때론 초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상한 앨리스와 같은 세상 속을 부유하거나 유목하는 과정이 그러했으며, 언어적 확장과 우발적으로 보이는 언어 꼴라쥬는 다다적인 감성을 전달하는 듯 느껴졌다. 게다가 작가가 거주했던 아일랜드 레지던시가 주는 개인적인 영감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그녀의 작업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느껴지는걸까 ? 짐짓 유쾌한 소녀적 감성으로 보여지지만, 그 속에서 공간을 접어버리고 시간성의 상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특히 « 너의 말, 나의 말 » 작업의 서문을 대신하는 단어 꼴라쥬와 그녀 작업실 벽에 무질서하게 붙여놓인 낙서같은 단어들의 나열은 단어가 지닌 통상적 의미를 불확실하게 만들면서 다른 차원의 의미로 연동작용시키는 듯한 인상을 받게한다. 언어 꼴라쥬는 실제 비디오 퍼포먼스의 밑그림과 같다. 말라르메의 시 « 주사위 던지기 » 처럼, 루이스 캐롤의 앨리스처럼 안강현은 어떤 시공간, 어떤 장소로 던져진다. 한 번의 던짐의 만드는 파문과 우연의 초현실적 상상력과 비디오 매체의 특성인 소리와 이미지 사이의 조합과 해체에 의해 작가는 지금여기라는 현장성현재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유쾌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by 라온 | 2008/01/29 13:36 | critique | 트랙백 | 덧글(0)

Review-댄스 퍼포먼스 eye [경기일보 2008-1-19]

경기일보_ http://www.kgib.co.kr/

호기심 가득한 관객의 시선뿐…

보라색과 녹색 가발을 쓴 여자들. 원형의 형태를 띤 무대는 커다란 천이 중앙을 가로 질러 설치돼 있다. 커피잔을 들고 사이버 상에서 들음직한 대화를 나눈다. 가벼운 일상의 대화는 몇 마디 단절된 의미로 전달된다.
댄스 퍼포먼스 EYE(지난해 11월29~30일)는 좀 색다른 공연이었다. 대사가 있는 댄스시어터를 지향한 것도 아니고, 현대무용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아니었다. 고양 아람누리의 실험극장 새라새극장 특성상 자유로운 공간연출이 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EYE는 분명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려 했다. 아니 어쩌면 보여주기 보다는 관객들이 느끼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안무자이자 공연출연자인 조희경씨는 “나에게 춤을 본다는 건 주장이나 이야기를 읽어 내는 게 아니라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감각으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무용이 눈에 보이는 것만 전제하진 않지만, EYE의 작품은 난해함보다는 어색함이었다. 특별한 줄거리도 클라이막스도 없는 작품이 어떤 감흥을 줄 지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조희경씨는 “이 작품은 내러티브나 극적 다이나믹이 없다”며 “(관객들은) 의도된 주장이나 줄거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춤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등의 질문과 생각 등을 떠올리며, 몸의 감각과 머리의 인식을 서로 짜집기하며 감상하면 된다”고 말했다.
조금은 역설적인 그의 답변처럼 작품은 단편적으로 엮여지면 생각의 꼬리를 물게 만들었다. 다만 ‘EYE’란 제목이 암시하듯, 시선을 따라 작품의 의미를 가늠해 볼 뿐이다.
알듯 모를듯한 사이버 대화에 이어 여행 가방이 등장한다. 가방은 떠남을 의미한다. 낯선 곳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도 포함된다. 잠시 동작이 멈추고 무대를 가른 천에 영상이 쏟아진다. 물론 낯선 이미지들이다. 기차의 객실 풍경이 잠시 비추는가 했더니, 기차에서 바라본 바다와 사바나 초원 같은 녹지공간이 나타난다. 이어 여러 동물들과 고풍스런 유럽의 시가지가 펼쳐진다.
20여분 동안 펼쳐진 장면은 사람의 눈이 아닌 빔프로젝트의 렌즈를 통해 상영됐다.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공연자들은 서로 짝을 지어 포옹하고 동선을 그으며 걷거나 제자리 걸음을 한다. 때론 알 수 없는 손동작을 곁들이거나 이태리어같이 낯선 나라 언어들도 토해낸다. 시간이 흐르자 천 너머로 박수소리가 난다. 천은 공연자는 물론 같은 목적으로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을 나눔으로써 또다른 기대와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한 공연장에서 서로 다른 반대쪽의 상황을 알 수 없음에 대한 궁금증이다.
어느새 천은 사라진다. 미리 준비한 여행가방을 하나씩 차지한 4명의 공연자들은 무대에 앉아 가방을 풀고 내용물을 꺼낸다.
각자의 취향을 상징하듯 인형이나 앨범, 책, 옷가지, 라디오 등을 펼쳐놓는다.
이들은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워 사적 공간임을 암시한다. 이런 과정을 서너차례 반복하며 짐을 싸고 푼다. 여행가방은 최소한의 생필품들이 담긴다. 떠남을 위한 준비물은 그래서 사적인 비밀을 품고 있다. 쉽게 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이 무대란 공개장소에 펼쳐짐으로 낯설음은 익숙함으로 바뀐다.

이후 공연자들은 “아빠”와 “엄마”란 단어들을 외친다. 집떠난 자식들의 귀소본능처럼 느껴진다. 사이키 조명이 번쩍이며 공연의 대미를 맞는다. 여러 이야기들이 공존하는 이 작품은 앞서 말한 ‘EYE’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보는 위치에 따라 사물은 그 형태를 달리한다. 때론 신기루처럼 눈은 착시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관객들은 퍼즐을 맞추듯 이미지들을 연결시켜 각자의 상황과 견줘 본다면 조금은 작품에 다가 갈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이미지들이 펼쳐진 이번 공연의 난해함은 줄거리 없음이 아니라 기획자의 시선과 관객들의 시선이 만나는 연결점을 찾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인위적으로 천을 나눔으로써 궁금증을 자아냈지만,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으로 끝난듯한 느낌이다. 메시지들이 하나로 엮일 수 있는 구심점 내지는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운 것도 난해함으로 끝나는데 한 몫한 것 같다.
/이형복기자 bok@kgib.co.kr

<전문가 비평> 힘없는 접촉의 나열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처음부터 다시 써.” “8천자 이내로.” 같은 대사들을 허공에 뿌리며 여행자용 가방을 든 사람들이 무대에 등장했을 때, 기대가 커졌다. 그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하려는 건 무엇일까.
조희경 안무의 ‘EYE’(지난해 11월29일 고양 아람누리 새라새극장)는 무대까지 독특하게 디자인했다. 무대를 중간 지대로 놓고 좌우에서 관객들이 바라볼 수 있는 이중 구조를 갖췄다. 그래서 무대 중간에 두른 막은 두 개의 공연을 보일 듯 안 보일 듯 엿보게끔 했다. 이런 공간 탐구는 조희경처럼 미술의 베이스를 가진 안무가로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의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런 시도는 막으로 가린 무대를 반만 보이게끔 궁금증을 유발하는 실제 효과가 있었다. 이는 투명한 시각을 통한 소통이라기보다는 공기나 피부 같은 촉각을 통한 소통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무대 디자인과 달리 실제로 진행되는 건 나열에 가까웠다. 가방을 내려놓은 무용수들이 그 공간을 거닐거나 서로 안는 장면은 접촉하는 몸들의 워밍업으로 보였다. 그 공간과 친해지기, 혹은 벽 허물기. 하지만 그런 디테일이 계속 이어졌고 워밍업 수준의 마찰만 등장하는 게 아쉬웠다. 춤을 추기도 했지만, 그것은 음악의 박자에 스텝을 맞추는 식이었다. 막을 넘나들면서 2인무나 독무가 펼쳐질 때, 색다른 징후가 발생하지 않을까 기다렸지만, 꽤 단조로운 수행이었다. 새로운 차이를 만들면서 어디론가 나아가지 않으면, 이상하게도 머무른다는 인상을 주는 게 공연의 생리이다. ‘EYE’ 역시 흘러가지 않음으로써 머무르고, 머무름으로써 정체돼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조희경은 아직도 담백한 감수성으로 몸들을 터치하면, 그 터치하는 몸짓의 조형이나 리듬 등과 관계없이 질감의 소박함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듯하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무용수들끼리의 촉각에선 가능해도 객석까지 전이되기에는 조금 역부족이다. 관객들은 시각을 통해 촉각으로, 전신 감각 등으로 나아가는 불리한 조건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망각하고 무용수들끼리 가냘픈 수준의 동작을 교환할 때, 그것은 자칫 아무 것도 아닌 것에 탐닉하거나 도취하는 모습으로 보일 소지가 다분하다.
준비된 영상이 어떤 코드로 접속하고 있는 것인지, 슈트케이스 속에서 나온 물건들이 무용수들의 내면을 어떻게 암시할 것인지 등등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펼쳐질 때 역시 단지 단순한 나열이자 단조로운 배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특히 몇 번 되풀이되는 슈트케이스 열어보이기 장면이 똑같은 방식일 때, 관객들까지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동일시하거나 감정이입하고 싶어도 그 입구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질적인 압박이 있어 강한 스트레스를 통해 자극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임팩트가 없는 표현을 고집하면서 작은 시도들을 저강도로 펼쳐놓을 때, 힘은 사라지는 게 아닐까. 말 사이로 오가면서, 막을 넘나들면서 춤을 춰도 그것이 박자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에 단지 춤을 춘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전달하는 게 아닐까. 감흥과 정념이 없는 무대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다.
조희경은 서울대 미대를 거쳐 무용원 창작과를 나오면서 한국 무용의 신경향을 선물할 것이란 기대 섞인 주목을 받은 안무가이다. 일찌감치 국제적인 물에서 놀면서 다원적인 시도를 하고 있는 건 그가 남다른 길을 간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EYE’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의 세계관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무용수들이 “엄마”나 “아빠” 같은 가족 삼각형에 갇힌 외마디를 던지고 간지러울 정도로 허약한 몸짓들에 머무를 때, 우리는 실망할 수밖에 없다. 나약한 반복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 잡동사니에 불과한 더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왕에 무대를 이중 구조로 삼았다면, 이편의 풍경과 저편의 풍경을 충돌시키거나 대조하면서 자신이 보는 세계의 실상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소한 산책이나 가벼운 접촉, 사적인 기호들에 매몰돼 있다는 점 등은 그런 가능성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문법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세계관이 작다는 것도 문제이다. 거대 이념이 사라진 현실에서도 시대 정신은 있고, 마이너리티도 살아 있다. 춤은 여전히 그 시대와 통해야 하며, 시공간 역시 현실과 튼튼한 채널을 확보해야 한다. 그것이 실재적이든, 은유적이든. 그런 연결이 없는 상황에서 몽상적인 기질도 퇴행하는 건 춤꾼의 정신건강에도 그다지 좋지 않다. /김남수 무용평론가

by 라온 | 2007/12/29 13:36 | critique | 트랙백 | 덧글(0)

Dance Performance 'EYE'

2007.11.29-30
Aramnuri Theater, Goyang
60 minutes
댄스 퍼포먼스 'EYE'
2007.11.29-30
고양 아람누리 극장
60분

by 라온 | 2007/12/01 09:46 | work | 트랙백 | 덧글(0)

댄스퍼포먼스EYE

Dance Performance 'EYE' (Moving images of stage)

2-channel video
Captured images from mini DV
10min/each
댄스퍼포먼스 'EYE'를 위한 동명의 무대영상
비디오 캡쳐
2-채널 프로젝션
각 10여분

by 라온 | 2007/11/30 01:55 | work | 트랙백 | 덧글(0)

Dance Performance <EYE>

                                              blog.naver.com/danceeye
















































  EYE                                                          

2007. 11. 29~11.30                                                                       

고양 아람누리 새라새 극장                                                                
오후 8시
                                                                                                                                 

 

일반 15,000원 / 학생 12,000원 / 단체할인(10인이상)10,000원 / 고양문화재단 회원할인 10% / 12세 이상 관람가

티켓예매    고양문화재단 / 인터넷예매  www.artgy.or.kr  / 전화예매  1577-7766 (전화예매시 장애우 50%(동반1인)할인)

문의   danceeye@naver.com    031-205-4960

  

구상 및 안무_조희경 

공연_ 송해인, 안강현, 조희경, 하재성 

미술 및 영상_ 안강현

무대 디자인_신현선 

음악_박성선 

의상_곽고은

포스터, 리플렛 디자인_ 이수연

무대감독_김강무

기획_정희선 

 

공연 참가자 소개

구상 및 안무/ 공연: 조희경_ 몸의 움직임과 여러 층의 의식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면서 함께 몸을 통해 드러나는지 와 그 인지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다. 미술과 안무를 공부했다.

 

미술 및 영상/ 공연: 안강현_ 비디오와 다양한 오브제를 다루는 설치작가로, 미술과 관객 그리고 작업과 공간이 만나는 지점과 그 방식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다.

 

공연: 송해인_ . 고등학교 6년간 한국무용을 전공하였고 대학에서 안무를 공부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시각적 공간적 연출에 흥미를 느껴 멀티미디어와 춤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공연: 하재성_ 배우, 다수의 연극과 영화작업을 하다가 최근에는 움직임작업에 관심을 보이고 활동하고 있음.Project Group 'P'라는 단체를 만들어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움직임창작활동을 하고 있음.

꿈은 좋은 아버지가 되는 되는 것임.

 

무대 디자인: 신현선_ 조명 디자이너,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의 협업을 즐기고 미래의 극장 공간에 관심이 많다.

 

음악: 박성선_ '소리'라는 것이 가진 무한한 표현적 가능성을 열심히 실험하고 있다.

무용음악과 영화음악, 게임음악, 애니메이션 등 소리와 다른 미디어의 결합하는 작업을 주로 하였고 실시간으로 음악적 시각적 요소들을 제어하는 멀티미디어 작품에도 관심을 가지며 작업하고 있다.

 

의상: 곽고은_ 움직이는 일을 좋아하며 그와 관련된 여러 작업을 하고 있다. 먼 미래에 구상하고 있는 " Show(공연) " 를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들을 익히고 있는 중이다.

 

무용공연 EYE

 

이렇게 집을 지으면 어떨까.

각자 자신의 연장을 가지고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 거다. 바닥에 선만 긋든, 하늘 높이 마루를 올리든 각자의 몫. 함께 한 채의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각각의 공간은 다른 재료와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우리는 이 공간들이 자유로이 부유하는 집에서 함께 산다.

어쩌면 집을 찾는 일은 집을 짓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여기, 무대가 있다. 관객이 있고 공연이 이루어진다.

관객은 우리가 지은 집을 본다.”

-안강현

  

 

나에게 장소는 무척 중요하다.

나는 나의 마음과 몸이 적합하게 느끼는 장소를 오랫동안 찾아 왔다.

시간도 다르고 공간도 다른 새로운 장소에 도착한다. 짐을 풀지만 나의 집은 없다.

장소의 이동에는 알맞음과 혼란, 편안함과 불편함 등의 여러 개의 시공간이 있다. 

내가 찾고 있는 땅

이제는 집을 짓기로 한다.”                         

- 조희경-

 

 

이 공연은, 안무자의 안무에서 공연자의 공연으로 안무가 전달될 때 그 전달과정에서의 의식과 몸의 작용에 안무의 초점을 두고 있다.

또한 왜 우리가 함께 작업할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여러 장르의 사람들과의 공동작업이 불가피한 공연작업 안에서 각각의 작업자들이 각자 자신의 작업 공간을 가지면서 어떻게 서로의 창조력을 확장할 수 있는지, 그 작업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by 라온 | 2007/11/02 15:03 | work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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