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댄스 퍼포먼스 eye [경기일보 2008-1-19]

경기일보_ http://www.kgib.co.kr/

호기심 가득한 관객의 시선뿐…

보라색과 녹색 가발을 쓴 여자들. 원형의 형태를 띤 무대는 커다란 천이 중앙을 가로 질러 설치돼 있다. 커피잔을 들고 사이버 상에서 들음직한 대화를 나눈다. 가벼운 일상의 대화는 몇 마디 단절된 의미로 전달된다.
댄스 퍼포먼스 EYE(지난해 11월29~30일)는 좀 색다른 공연이었다. 대사가 있는 댄스시어터를 지향한 것도 아니고, 현대무용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아니었다. 고양 아람누리의 실험극장 새라새극장 특성상 자유로운 공간연출이 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EYE는 분명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려 했다. 아니 어쩌면 보여주기 보다는 관객들이 느끼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안무자이자 공연출연자인 조희경씨는 “나에게 춤을 본다는 건 주장이나 이야기를 읽어 내는 게 아니라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감각으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무용이 눈에 보이는 것만 전제하진 않지만, EYE의 작품은 난해함보다는 어색함이었다. 특별한 줄거리도 클라이막스도 없는 작품이 어떤 감흥을 줄 지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조희경씨는 “이 작품은 내러티브나 극적 다이나믹이 없다”며 “(관객들은) 의도된 주장이나 줄거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춤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등의 질문과 생각 등을 떠올리며, 몸의 감각과 머리의 인식을 서로 짜집기하며 감상하면 된다”고 말했다.
조금은 역설적인 그의 답변처럼 작품은 단편적으로 엮여지면 생각의 꼬리를 물게 만들었다. 다만 ‘EYE’란 제목이 암시하듯, 시선을 따라 작품의 의미를 가늠해 볼 뿐이다.
알듯 모를듯한 사이버 대화에 이어 여행 가방이 등장한다. 가방은 떠남을 의미한다. 낯선 곳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도 포함된다. 잠시 동작이 멈추고 무대를 가른 천에 영상이 쏟아진다. 물론 낯선 이미지들이다. 기차의 객실 풍경이 잠시 비추는가 했더니, 기차에서 바라본 바다와 사바나 초원 같은 녹지공간이 나타난다. 이어 여러 동물들과 고풍스런 유럽의 시가지가 펼쳐진다.
20여분 동안 펼쳐진 장면은 사람의 눈이 아닌 빔프로젝트의 렌즈를 통해 상영됐다.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공연자들은 서로 짝을 지어 포옹하고 동선을 그으며 걷거나 제자리 걸음을 한다. 때론 알 수 없는 손동작을 곁들이거나 이태리어같이 낯선 나라 언어들도 토해낸다. 시간이 흐르자 천 너머로 박수소리가 난다. 천은 공연자는 물론 같은 목적으로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을 나눔으로써 또다른 기대와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한 공연장에서 서로 다른 반대쪽의 상황을 알 수 없음에 대한 궁금증이다.
어느새 천은 사라진다. 미리 준비한 여행가방을 하나씩 차지한 4명의 공연자들은 무대에 앉아 가방을 풀고 내용물을 꺼낸다.
각자의 취향을 상징하듯 인형이나 앨범, 책, 옷가지, 라디오 등을 펼쳐놓는다.
이들은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워 사적 공간임을 암시한다. 이런 과정을 서너차례 반복하며 짐을 싸고 푼다. 여행가방은 최소한의 생필품들이 담긴다. 떠남을 위한 준비물은 그래서 사적인 비밀을 품고 있다. 쉽게 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이 무대란 공개장소에 펼쳐짐으로 낯설음은 익숙함으로 바뀐다.

이후 공연자들은 “아빠”와 “엄마”란 단어들을 외친다. 집떠난 자식들의 귀소본능처럼 느껴진다. 사이키 조명이 번쩍이며 공연의 대미를 맞는다. 여러 이야기들이 공존하는 이 작품은 앞서 말한 ‘EYE’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보는 위치에 따라 사물은 그 형태를 달리한다. 때론 신기루처럼 눈은 착시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관객들은 퍼즐을 맞추듯 이미지들을 연결시켜 각자의 상황과 견줘 본다면 조금은 작품에 다가 갈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이미지들이 펼쳐진 이번 공연의 난해함은 줄거리 없음이 아니라 기획자의 시선과 관객들의 시선이 만나는 연결점을 찾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인위적으로 천을 나눔으로써 궁금증을 자아냈지만,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으로 끝난듯한 느낌이다. 메시지들이 하나로 엮일 수 있는 구심점 내지는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운 것도 난해함으로 끝나는데 한 몫한 것 같다.
/이형복기자 bok@kgib.co.kr

<전문가 비평> 힘없는 접촉의 나열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처음부터 다시 써.” “8천자 이내로.” 같은 대사들을 허공에 뿌리며 여행자용 가방을 든 사람들이 무대에 등장했을 때, 기대가 커졌다. 그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하려는 건 무엇일까.
조희경 안무의 ‘EYE’(지난해 11월29일 고양 아람누리 새라새극장)는 무대까지 독특하게 디자인했다. 무대를 중간 지대로 놓고 좌우에서 관객들이 바라볼 수 있는 이중 구조를 갖췄다. 그래서 무대 중간에 두른 막은 두 개의 공연을 보일 듯 안 보일 듯 엿보게끔 했다. 이런 공간 탐구는 조희경처럼 미술의 베이스를 가진 안무가로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의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런 시도는 막으로 가린 무대를 반만 보이게끔 궁금증을 유발하는 실제 효과가 있었다. 이는 투명한 시각을 통한 소통이라기보다는 공기나 피부 같은 촉각을 통한 소통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무대 디자인과 달리 실제로 진행되는 건 나열에 가까웠다. 가방을 내려놓은 무용수들이 그 공간을 거닐거나 서로 안는 장면은 접촉하는 몸들의 워밍업으로 보였다. 그 공간과 친해지기, 혹은 벽 허물기. 하지만 그런 디테일이 계속 이어졌고 워밍업 수준의 마찰만 등장하는 게 아쉬웠다. 춤을 추기도 했지만, 그것은 음악의 박자에 스텝을 맞추는 식이었다. 막을 넘나들면서 2인무나 독무가 펼쳐질 때, 색다른 징후가 발생하지 않을까 기다렸지만, 꽤 단조로운 수행이었다. 새로운 차이를 만들면서 어디론가 나아가지 않으면, 이상하게도 머무른다는 인상을 주는 게 공연의 생리이다. ‘EYE’ 역시 흘러가지 않음으로써 머무르고, 머무름으로써 정체돼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조희경은 아직도 담백한 감수성으로 몸들을 터치하면, 그 터치하는 몸짓의 조형이나 리듬 등과 관계없이 질감의 소박함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듯하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무용수들끼리의 촉각에선 가능해도 객석까지 전이되기에는 조금 역부족이다. 관객들은 시각을 통해 촉각으로, 전신 감각 등으로 나아가는 불리한 조건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망각하고 무용수들끼리 가냘픈 수준의 동작을 교환할 때, 그것은 자칫 아무 것도 아닌 것에 탐닉하거나 도취하는 모습으로 보일 소지가 다분하다.
준비된 영상이 어떤 코드로 접속하고 있는 것인지, 슈트케이스 속에서 나온 물건들이 무용수들의 내면을 어떻게 암시할 것인지 등등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펼쳐질 때 역시 단지 단순한 나열이자 단조로운 배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특히 몇 번 되풀이되는 슈트케이스 열어보이기 장면이 똑같은 방식일 때, 관객들까지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동일시하거나 감정이입하고 싶어도 그 입구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질적인 압박이 있어 강한 스트레스를 통해 자극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임팩트가 없는 표현을 고집하면서 작은 시도들을 저강도로 펼쳐놓을 때, 힘은 사라지는 게 아닐까. 말 사이로 오가면서, 막을 넘나들면서 춤을 춰도 그것이 박자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에 단지 춤을 춘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전달하는 게 아닐까. 감흥과 정념이 없는 무대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다.
조희경은 서울대 미대를 거쳐 무용원 창작과를 나오면서 한국 무용의 신경향을 선물할 것이란 기대 섞인 주목을 받은 안무가이다. 일찌감치 국제적인 물에서 놀면서 다원적인 시도를 하고 있는 건 그가 남다른 길을 간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EYE’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의 세계관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무용수들이 “엄마”나 “아빠” 같은 가족 삼각형에 갇힌 외마디를 던지고 간지러울 정도로 허약한 몸짓들에 머무를 때, 우리는 실망할 수밖에 없다. 나약한 반복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 잡동사니에 불과한 더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왕에 무대를 이중 구조로 삼았다면, 이편의 풍경과 저편의 풍경을 충돌시키거나 대조하면서 자신이 보는 세계의 실상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소한 산책이나 가벼운 접촉, 사적인 기호들에 매몰돼 있다는 점 등은 그런 가능성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문법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세계관이 작다는 것도 문제이다. 거대 이념이 사라진 현실에서도 시대 정신은 있고, 마이너리티도 살아 있다. 춤은 여전히 그 시대와 통해야 하며, 시공간 역시 현실과 튼튼한 채널을 확보해야 한다. 그것이 실재적이든, 은유적이든. 그런 연결이 없는 상황에서 몽상적인 기질도 퇴행하는 건 춤꾼의 정신건강에도 그다지 좋지 않다. /김남수 무용평론가

by 라온 | 2007/12/29 13:36 | critiqu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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